청일·러일전쟁 후 펼쳐진 ‘토지 약탈의 역사’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 이후,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에서 어떤 방식으로 토지정책을 추진하며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했는지를 정리한 것입니다. 시대별 흐름을 따라가면서, 왜 이런 토지정책이 만들어지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한반도와 만주에서 진행된 토지조사와 수탈 정책은 동아시아 근대사의 굴곡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1. 청일전쟁 이후: 일본 토지정책의 기반 다지기
1) 청일전쟁의 배경과 결과
19세기 말 조선은 동학농민운동을 비롯해 내부적 혼란이 심각했고, 이를 틈타 열강이 이권을 노리고 개입했습니다. 청국과 일본은 조선을 둘러싸고 충돌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청일전쟁(1894~1895)입니다.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요동반도(랴오둥 반도) 등을 할양받았으나,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해야 했습니다. 비록 요동반도는 돌려주었지만, 이 전쟁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비약적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다.
2) 갑오·을미개혁과 일본의 간섭
전쟁 직후 일본은 조선 정부에 일련의 개혁을 요구해 갑오개혁(1894)과 을미개혁(1895)을 추진하게 했습니다. 신분제를 폐지하고 재정을 일원화하는 등 근대화를 모색했지만, 토지제도 개혁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이후 대한제국(1897~1910)이 탄생했으나, 재정과 행정력이 부족해 ‘지계(地契)’ 발급 등 근대적 토지 소유권 확립 시도가 전국으로 확산되지 못했습니다. 이 무렵 일본의 간섭은 이미 조선 사회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2.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와 만주에서의 전환점
1) 러일전쟁(1904~1905)의 발발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과 만주를 두고 대립한 것은 러일전쟁(1904~1905)으로 이어졌습니다.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를 위해 남하정책을 폈고, 일본은 조선을 교두보 삼아 만주로 진출하려 했습니다.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만주와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크게 축출했습니다.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이 랴오둥반도 조차권과 남만주 철도를 넘겨받고, 조선에서 ‘특수 이익’을 갖는 것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한반도: 통감부 시대와 일본인 토지 취득
을사늑약(1905)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1906)되자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 내 토지정책을 주무르기 시작했습니다. 광무개혁으로 시도되던 지계 발급 작업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일본인 이주민이 편하게 토지를 취득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가 재편되었습니다. 재판권·경찰권 등이 일본 측에 장악되면서, 토지 분쟁이 발생해도 조선인이 보호받기 어려운 구조가 고착화되었습니다.
3) 만주(동북삼성)에서의 활동 기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남만주 철도(SMR)를 인수하고, 뤼순(여순)·다롄(대련) 등 요동반도 일대 조차권을 획득했습니다. 만주는 청나라 영토였으나, 일본은 경제·군사적 침투를 가속해 철도 주변을 중심으로 토지와 자원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훗날 만주사변(1931) 이전까지 지속된 일본의 ‘대륙 진출’ 기반을 닦은 셈이었습니다.
3. 일제강점기(1910~1945) 한반도의 토지조사사업
1) 한일병합과 조선총독부
1910년 한일병합(경술국치)으로 대한제국은 일본 식민지로 완전히 전락합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 통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대대적으로 벌였습니다. 전국 토지를 일일이 조사·측량해 근대적 등기 형식인 ‘토지조사부’를 작성했지만, 겉으로 내세운 ‘소유권 명확화’와 달리 실제 목적은 토지를 수탈하고 일본인 지주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식민지 토지정책의 실상
이 사업을 통해 왕실·종중·향촌 공동체가 관리하던 토지 상당수가 국유지나 일본인 소유로 귀속되었습니다. 소유권 증명을 할 서류가 없었던 조선 농민들은 순식간에 경작권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이후 산미증식계획 같은 제도가 결합되어, 조선에서 생산된 쌀 등 농산물이 일본으로 대량 반출되었습니다.
4. 만주사변(1931) 이후: 만주의 토지 수탈 강화
1) 만주사변과 만주국(1932~1945)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본 관동군이 ‘류탸오후(柳條湖) 사건’을 조작해 만주를 본격 점령했습니다. 1932년에는 만주국(滿洲國)을 수립해 푸이를 ‘황제’로 내세웠지만, 실제 권력은 일본 관동군과 남만주철도 주식회사, 그리고 대기업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만주 전역에서 토지 측량과 등록을 강행해 중국인과 조선인 소작농의 땅을 빼앗거나 소유를 제한했습니다.
2) 일본 이민정책과 농업개발
만주는 비옥한 평야가 넓어, 일본 본토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척민’을 대량으로 이주시켰습니다. 현지 주민들은 낮은 지위로 전락해 헐값의 노동력으로 전용되거나, 소작 형태로 전환되었습니다. 동시에 석탄·철광 등 풍부한 자원을 개발해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군사·산업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5. 한반도와 만주의 공통된 특징: 제국주의적 토지 침탈
- 근대 등기제도 악용
조선총독부와 만주국 정부(실제로는 일본 관동군)는 ‘근대적 조사·측량’을 내세워 토지를 재분배했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어디까지나 식민 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고,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에서 현지인들이 제대로 보호받기 어려웠습니다. - 현지 농민의 소작화
한반도에서는 조선 농민이, 만주에서는 중국인과 조선 이주민이 대규모로 소작농이 되어 높은 지대(地代)를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생산물 대부분이 일본 제국에 귀속되면서 농민들은 더더욱 궁핍에 시달렸습니다. - 무력과 정치적 압박의 배경
법·제도만이 아니라 무력과 경찰권 행사로 현지 주민의 재산권을 무시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병합과 강제적 통치가, 만주에서는 관동군의 군사행동이 정책을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6. 맺음말: 동아시아 근대사가 남긴 교훈
청일전쟁(1894~1895)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판도를 바꾼 중대 분쟁이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빠르게 확립했고, 이 지역의 토지정책은 ‘근대화’라는 명분 아래 무력 침략과 경제적 수탈로 귀결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며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전통적 소유구조가 해체되었고, 만주에서도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워 대규모 이민정책과 토지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그 결과로 현지 주민들은 자영농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식민지 경제의 희생양이 되어갔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제국주의 세력이 ‘근대’의 외피를 쓰고, 실제로는 지역 주민의 삶을 파괴하고 자원을 독점한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날에도 동아시아 각국은 이 시기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며, 침략과 불평등 조약에 근거한 국제정치가 가져다준 문제들을 되짚고 있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반성하는 것은, 미래의 평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 과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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